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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기록

✔️ 막판 뒤집기 막판 뒤집기 윤형석 서른부터 대략 삼십 년간 공황 장애 치료약을 드셨다는 어머니뻘 되신 성 선생님 이제는 온전히 약을 끊게 되어 자생의 힘으로 사신다는 그녀와 서른부터 비로소 난독증을 조금씩 덜어내 이제는 십여 년째 자력으로 편히 글을 읽을 수 있는 내가 만났다 삼십 년의 세월이 삭제된 그녀와 나 그녀는 올해 서른이라 생글생글 나는 호기심 왕성한 갓 열 살 참으로 장래가 총망되는 그녀와 나, 으쌰 으쌰! 2024/09/05 더보기
✔️ 필름 카메라 필름 카메라 윤형석 반가운 마음에 받아야 할 전화 첫마디가 무슨 일이야 한다 지난 몇 개월 동안 119 출동을 비롯 병원 생활 하신 부모님으로 인해 가족 중 누군가 전화가 오면 덜컥 겁이 난 채 먼저 전화의 목적을 묻게 되었다 오늘 통화는 고맙게도 마음만 덜컹하고 넘어간다 점점 무서워지는 혈육과의 통화에 마음이 아리다 삶은 다시 찍을 수 없는 서툰 것들을 맞이하는 순간이 줄짓는 영사기 속 필름의 나열일까 2024/09/05 더보기
✔️ 안전한 신발 안전한 신발 윤형석 덩치 큰 멋진 자동차 운전대에 초보 운전수 흉내 내는 앳된 아이 같은 처자가 직각으로 앉아있다 뒷 유리 초보운전 팔랑팔랑, 그런데 235 mm 신발을 신는 바퀴가 275 mm 신발을 신고 있다 자동차 신발이 본래 것 보다 크면 안전은 상승하고 기름은 조금 더 적신다는데, 과한 바퀴가 비효율이겠다 하다가 늘 부족하게 키운 우리 딸 서현이 생각난다 기름은 마구 적셔도 되니 안전하고 든든하게 다니라는 딸만 생각하면 늘 걱정이 앞서는 나처럼 앳된 운전수의 아비가 부러 과한 신발을 달아 주었을지 모르겠다 앞선 나의 섣부른 생각에 염치없다가 생각나는 또 다른 한 여인 늘 걱정이 많던 우리 어머니가 생각난다 2024/09/04 더보기
✔️ 여치의 여행 여치의 여행 윤형석 출근길 신호대기 중 차량 본넷에 여치 한 마리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집념이 올라왔다 애기야, 그대로 붙어 있어 주니라 너른 풀숲에 놓아줄 테니 잠시 붙어만 있어 주니라 애석한 아비의 마음은 잠깐 동행의 시간은 십여분 도착 직전 작은 풀숲을 향해 극적으로 날아가는 잠시 정든 여치를 목격한다 그래 작은 풀 뭉치라도 있어 다행이다 가여운 여치는, 그런데 날아와 앉은 그곳이 움직이는 대지인 줄 모르고 가여운 여치는 잠시 머물렀을 텐데 음속 같았을 시속 70의 속도와 살기 위해 개구리 발바닥이 되어 엎드린 채 끈적하게 붙어 있어야 했을 억겁의 십여분에 더는 버틸 수 없어 풀 몇 줌에 떠나온 곳을 본 듯, 필경 생을 건 날개짓을 했을 거란 생각이 엄습하니 목이 메인다 짧은 여운에 나의 지난날.. 더보기
✔️ 위로 위로 윤형석 여수 쫑포 앞바다 바닷물 넘실 거리는 장면이 눈앞에서 보이는 역사와 전통의 횟집 그곳에서 멍게 한 사발과 개불 한 사발과 해삼 한 사발과 꾸죽 한 사발을 깔아 놓고 달콤한 소주잔 짠짠짠 하며 주눅 든 내 정신을 꺼내어 한잔 내 마음을 꺼내어 한잔 졸졸졸 따라주며 괜찮다 괜찮다 잘하고 있다 위로해 주고 싶다 2024/09/03 더보기
✔️ 섬살이 섬살이 윤형석 고향 남쪽 바다 아래 꽃섬에서 유년을 보내다 육지 세상으로 건너와 성년이 되고 아비가 되었다 육지 세상살이가 실은 내 고향 섬살이와 같다 여긴다 삼 면은 푸른 바다에 한 면은 녹슨 철책에 포위당한 섬살이와 닮았다는 귀결 남한 반도의 대륙에서 저 먼 대륙의 희망봉과 호카 곶을 향해 땅과 땅을 연결하여 걸어가는 대서사의 장면은 불가한 것인가 백년 전 루쉰 선생께서도 말씀하신 걷는 이가 많아지면 길이 된다는 희망 나는 희망을 말하고 싶다 2024/09/02 더보기
✔️ 승자 대결 승자 대결 윤형석 휴일 아침 혼자 자주 들리는 국밥집 황진이 옆 자리 어중간 중늙은 두 분이서 식사하신다 말씀이 참 많으시다 두 분 중 한 분이 식사 중에 먼저 자릴 뜨신다 악수를 마치고 남은 분께서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하신다 오라고 오라고 밥 먹고 가라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신다 나처럼 외로우신가 보다 끝내 성과 없는 통화를 끝내신다 혼자 와서 혼자 가는 나 둘이 와서 혼자 가는 그대 누가 덜 외로울까 2024/09/01 더보기
✔️ 스쳐지나다 스쳐지나다 윤형석 멀리 지방 국립 대학교 도서관이 보인다 비재학생 신분으로 근 일 년을 살았던 도서관 아침이면 늙은 아비가 밥상을 차려 두고 나가시던 그때 정오경에 도착해서 밤늦게 돌아가던 그때 막내 누나 800cc 경차를 뺏어 타고 가짜 휘발유 신나를 넣고 다닌 그때 해맑은 어린 영혼이 내뿜던 흰 담배 자욱하던 그때 그때가 가장 절정이지 않았나, 가장 완곡했던 절정의 그때 지금은 경찰이 된 그 아이는 어디에 있지 지금은 제약 회사에 있는 건설 회사에 있는 그 아이들은 어디에 있지 삼천 원짜리 기사 식당을 곧잘 가던 그때가 어디에 있지 고가도로 아래 명당자리 캔맥주 마시던 그때가 어디에 있지 훗날 지금을 찾아 그때와 같이 어디에 있지 할까 저물녘 이 차선 막힌 길을 앰뷸런스 한 대가 비집고 비집고 지나가.. 더보기
✔️ 풍력 발전소에서 풍력 발전소에서 윤형석 먼 나라 일본 규슈라는 곳에 태풍이 붙어있단다 크기는 소(小) 자라는데 성능은 대(大) 자 라고 한다 덤으로 이곳 남해안 일대가 강풍으로 술렁인다 거센 바람이 휘청휘청 찌릿하다 왜국(倭國)의 바람이다 사도광산은 결국 유네스코에 합격했단다 뱅글뱅글 돌고 있는 거대한 풍력 선풍기들도 찌릿찌릿하겠다 웅장한 목소리로 제 일을 하고 있다 쇠 갈리는 소리를 내며, 왜곡(歪曲)의 바람이다 언제 사그라들지 모를 바람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깝다 쇠 갈리는 소리가 끊길까 무섭다 2024/08/30 더보기
✔️ 바람 눈물 바람 눈물 윤형석 담배 한 대 물고 싶어 여우굴로 걸어가다 하루아침에 차분해진 바람결에 참 낭만스럽다 한다 다가오는 계절 내음도 모셔왔다 가을바람 부는 날 난데없이 울컥하다 울린다 차분해진 바람결에 산에 가고 싶어진다 언젠가 너는 왜 산에 가, 누가 물었다 산이 내게로 올 수 없으니 내가 가, 했다 불볕에 길 잃은 아이가 헤매이다 가을바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눈물 바람 부는 날 산에 가는 길 2024/08/28 더보기